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델바이스 해적 (문단 편집) == 활동 == 초기의 에델바이스 해적 활동은 어지간한 나치 충성파가 아닌 이상 별로 이상하게 볼 거리가 없었다. 주중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도시락]]과 배낭을 챙겨 주변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 휴식을 즐겼다. 이들은 자신과 달리 집단 내에서는 [[똥군기]]나 잡으며 [[군대놀이]]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처럼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던 히틀러유겐트를 경멸했고 히틀러유겐트도 에델바이스 해적을 빈둥거리며 놀러 다니고 방종한 짓이나 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순찰을 돌면서 이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히틀러유겐트는 역설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면서 점차 조직이 해이해지고 있었다. 특히 독일이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시달리기 시작한 1940년대 초반이 되자 히틀러유겐트의 주요 시설과 [[유스호스텔]], [[체육관]] 등이 폭격으로 소실되는 일이 잦아졌고 이에 따라 이들에게 주어졌던 하이킹이나 [[운동회]] 등 여가 기회는 계속 축소되었다. 결국 나머지 시간은 병영화된 학교에서 따분한 군사 훈련만 반복하다가 징집 연령이 되면 [[독일군]]에 [[입대]]하는 식으로 사실상 [[유년사관학교]]나 마찬가지가 되면서 청소년들은 더욱 히틀러유겐트를 멀리하게 되었다. 또 에델바이스 해적은 [[히틀러유겐트]](남자)-[[독일소녀동맹]](여자)으로 완벽하게 성적으로 분리된 관제 청소년 단체들과 달리 자연스럽게 또래의 이성과 어울려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유겐트와 게슈타포는 에델바이스 해적의 이런 교제를 마치 [[난교]] 파티라도 벌이는 것처럼 악의적으로 상부에 보고했고 이에 따라 나치와 점점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에델바이스 해적은 나들이 때 [[히틀러 유겐트]] 순찰대가 어설프게 시비를 걸어오면 바로 말다툼이나 몸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고 특히 몸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상술했듯 거친 노동자 집안 출신들이 많다 보니 전투력이 우월하여 [[히틀러유겐트]] 단원들을 [[역관광]] 태우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정도였나면 단원들이 계속 망신당하고 돌아오게 되자 지역 유겐트 대장이 [[질서경찰]]이나 [[게슈타포]]에게 검거 작전을 펴 달라고 떼를 쓰는 지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중 노동자 부족으로 인한 임금의 상승으로 몇몇 에델바이스 해적은 궁핍한 배급제와 극히 제한된 여행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히치하이킹]]과 [[무임승차]] 등으로 훨씬 먼 [[오스트리아]]나 [[바이에른]], 슈바르츠발트(현 [[바덴-뷔르템베르크]])까지 장거리 여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당시 좀처럼 직접 만날 수 없었던 타지의 청소년들과 어울렸고 히틀러유겐트에서는 금지곡이었던 유행가를 부르며 휴식을 즐겼다. 이들이 부르던 유행가는 기존의 것도 있었지만 주로 가사를 바꿔 히틀러유겐트를 조롱하거나 나치,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까지 [[디스#s-3|디스]]하는 [[민중가요]]식으로 [[마개조]]한 것이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